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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빠지다/책에 빠지다

역사e, 그 세번째 이야기_크리스마스, 조선에 오다

 

"나라의 근본은 무릇 백성이다." - 삼봉 정도전(조선의 정치가)


요다음 토요일은...

세계 만국이 이날을 1년 중에

제일가는 명절로 여기며

모두 일을 멈추고 온종일 쉰다고 하니

우리 신문도 그날은 출근 아니라 터이

이십팔일에 다시 출판할 터이니 그리들 아시오.

- 독립신문 1897년 12월 23일

 

■ 조선 땅에 상륙한 크리스마스

 

 17세기경 한반도에 유입된 천주교는 처음에 학문의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천주학이라 명명되다가 이후 신앙의 형태로 발전했다. 충효를 중시했던 조선에서 천주교의 교리는 환영받지 못했다.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천주교는 임금과 아비도 모르는 근본 없는 종교로 인식됐다. 1866년 병인양요가 있기 전까지 약 100여 년 가까이 이어진 천주교 박해는 1800여 명을 순교자로 희생시킨 뒤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19세기 말엽, 미국 교회의 해외 선교 열의가 높아지면서 조선 땅에 하나님을 믿는 이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이들은 개항 이후인 1884년 9월, 중국에 있던 의사이자 선교사 알렌을 조선으로 파견한다. 알렌이 제물포에 첫발을 디뎠던 당시에도 흥선대원군이 주도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천주교 박해의 여파는 남아 있었다. 문호는 개방했지만 천주교 전파를 금지하고 있던 조정은 개신교의 선교 역시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알렌은 복음 전파보다 문명 전파가 먼저라고 판단하고 의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갑신정변 때 증상을 입었던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의 목숨을 살려내자 알렌의 위상은 단번에 달라졌다. 1884년 12월 26일 자 알렌의 일기에는 한국에서 지낸 첫 번째 성탄절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민영익을 잘 치료해준 대가로 일번주에 조선 국왕으로부터 멋진 선물을 받았다."

 

 여기서 멋진 선물이란 비단 자수가 수놓인 병풍과 고려자기를 말한다. 조선 국왕의 선물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알렌의 공로를 인정해 이듬해 2월에 고종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설립도 허락했다. 제중원은 향후 선교사들이 거치는 관문이 됐고, 이듬해에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해 본격적인 의료 활동과 교육 사업을 펼쳤다.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개선교의 물결은 18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어 1945년까지 내한한 1500여 명의 선교사 열 명 중 일곱 명은 미국 국적의 선교사였다. 그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가지고 온 크리스마스는 당시 미국에서 거의 완성된 형태를 갖춘 '근대적인 크리스마스'였다.

 

 

 

 성탄절은 예수그리스도의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날이지만, 예수가 12월 25일 0시에 탄생했다는 역사적인 확증은 없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전통을 갖고 있던 고대 로마와 이집트 등에서는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 즈음에 축제를 벌였다. 이곳을 점령한 로마 황제였던 율리우스 1세는 4세기 중반, 이 축제를 예수의 탄생일로 지키기 시작했다. 이교도의 태양신 축제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겹치게 한 것이다.

 이국의 땅에 온 미국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성탄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조촐하게 가족과 성탄절을 보내면서 조선 사람들과 천천히 스킨십을 시도한다. 언더우드는 1887년부터 자신의 사랑방에서 조선 사람 몇몇과 함께 예배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해 겨울 성탄절에 그들을 초대한다. 선교사들과 초기 개신교 신자들이 함께 시작한 성탄절 행사에는 해가 갈수록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진기한 풍경을 구경하기 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고 임금이 있는 궁까지 닿았다. 명성황후는 어느 날 언더우드 목사의 무인을 초대해 성탄절에 대해 물었다. 훗날 상투의 나라라는 책에서 언더우드 여사는 이날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황후는 크리스마스 전날에 나를 불러서 우리의 위대한 축제가 지니고 있는 기원과 의미, 축하하는 방법 등을 물었다. 누가 이보다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천사들의 합창과 별들에 대하여, 그리고 말구유에 누운 어린아이에 대하여, 속죄 받아야 할 버림받은 세상에 대하여,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황후는 깊은 흥미를 느끼며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명성황후 시해되기 1년 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었다. 조선에서의 선교는 교회보다 학교를 통해 주로 이뤄졌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교육 사업을 통한 선교 활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아펜젤러는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그와 함께 입국한 언더우드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고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필두로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배화학당 등 개화기 조선에서 근대화 교육을 수행한 학교들은 모두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곳들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고 문맹률이 높았던 여성들 역시 이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 학생들이 하나둘 늘어갔고, 세례를 받는 교인도 하나둘 늘어갔다. 이와 더불어 크리스마스는 점점 조선 땅에서 중요한 축일로 자리잡아갔다. 누구나 교회 안으로 들어와 함께 파티를 즐겼다. <독립신문>은 1896년 12월 24일 자 기사에 크리스마스에 대한 논설을 싣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논설에서 크리스마스를 '명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내일은 예수그리스도의 탄일이라 세계 만국에 큰 명졀이니 내일 죠션 인민들도 마음에 빌기를 죠션 대군쥬 폐하께와 왕태자 뎐하의 셩톄가 안강 하시고 나라 운슈가 영원하며 죠션 젼국이 화평하고 인민들이 무병하고 부요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졍셩으로 빌기를 우리는 바라노라."

 

 이틀 후인 12월 26일자 기사에서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여러 가지 색깔의 등과 조선 국기를 높이 달고 '예수 탄일 경축회'를 했다고 소식을 전할 만큼 크리스마스는 한반도에서 축일로 자리를 잡아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빠른 속도였다.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 중용 2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