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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빠지다/책에 빠지다

역사e, 그 세번째 이야기_조선을 덮은 하얀 연기_담배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나라의 근본은 무릇 백성이다." - 삼봉 정도전(조선의 정치가)


이것은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에 도움을 주며

가슴이 답답할 때 효과적이고

한겨울 추위를 막는 데 유익하다

 

■ 요망한 풀, 한반도에 상륙하다


 1492년 콜럼버스와 함께 신대륙에 내린 선원들은 이상한 풍경을 보았다. 원주민들이 풀을 태워 연기를 들이마시는 모습이었다. 이후 이 잎사귀는 타바코라는 이름을 얻어 식민지 쟁탈전의 파도를 타고 인도, 아프리카, 유럽을 거쳐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상륙했다. 아시아에서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과 활발히 교역했던 일본에 우선 들어왔고 이후 현해탄을 건너 조선으로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담배가 전해졌을 때에 담배는 약초로 여겨졌다.

 담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인조실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인데 그 잎이 큰 것은 7, 8촌쯤 된다. 가늘게 썰어 대나무 통에 담거나 혹은 은이나 주석으로 통을 만들어 담아서 불을 붙여 빨아들이는데 맛은 쓰고 맵다.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시킨다고 하는데, 오래 피우면 가끔 간의 기운을 손상시켜 눈을 어둡게 한다.

 이 풀은 병진(1616년), 정사(1617년)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1621년), 임술(1622년)년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라고 하고 혹은 연주라고도 하였고,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교육까지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 군인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하나둘식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담배는 대략 1600년 즈음해서 조선에 그 존재를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나 술 대신 담배로 손님 대접을 하는 문화도 생겨났다. 담배를 약이라 여긴 사람들은 담이나 기침, 콧병을 치료했다. 특히 회충으로 인한 횟배앓이에는 담배가 특효약으로 통했다. 조선 전역은 이 요망한 풀에 홀리고 말았다.

 담배를 가리키는 별칭은 여러 가지였다. 타바코라는 말을 한자로 만들어 담바고라고도 불렀고,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초 혹은 남쪽의 신비한 약초라해서 남령초라 불리기도 했다. 근심을 잊게 한다 하여 망우초,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어 상사초라고도 했다. 동아시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고추,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도 이즈음에 조선 땅으로 흘러들어왔지만 담배만큼 사람들을 단번에 사로잡지는 못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울의 시전에는 쌀, 면포, 어물 다음으로 담배의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 농민들은 담배를 재배해 청나라에 팔기도 했다. 담배는 청나라와의 밀무역 인기 품목이었다. 경상도 지방에서 불붙은 담배 재배로 짭짤한 재미를 본 사람들은 더 많은 물량 확보를 위해 보리나 콩 대신 담배를 심었다. 식량 생산에 차질이 생기자 급기야 조정은 비옥한 삼남 땅에는 담배를 심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고 밀수출하다 적발되면 참수형을 시킨다고 으름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담배 피우는 맛과 담배 파는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유혹을 쉬이 떨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소문난 '골초 국가'였다. 조선의 르네상스기인 18세기 말 정조 때 조선의 흡연 인구는 전체의 25퍼센트에 달했다. 전체 인구 1500만 명 중 360만 명 이상이 담배를 피웠다는 것이다. 사대부들은 긴 담뱃대에 불을 붙여주는 연동을 데리고 다녔다. 양가집 마님들은 나들이를 할 때에 담배와 담배쌈지를 든 담배 전담 여종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남녀노소 모두 담배를 피워대는 것은 사실 양반들에게 못마땅한 일이었다. 그래서 양반들은 담뱃대 길이로 신분을 구별하게끔 했다. 지체 높은 분들은 긴 장죽을, 서민은 짧은 곰방대를 사용하게 한 것이다. 어린아이들도 흡연 열풍 가운데 예외는 아니었다. 사랑방, 안방, 우물가, 돌담 옆 할 것 없이 조선 전역에서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서당에서 훈장과 학동이 맞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임금과 신하가 조회를 하는 정전도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 담배 이름에 담긴 시대상

 
국내에 출시된 담배의 이름에는 우리 역사의 풍경들이 그대로 배어있다. 지금과 같은 원통형 담배가 만들어진 것은 1945년 9월의 일인데 광복을 기념해 출시된 이 담배의 이름은 '승리'였다. 당시 담배 한갑의 가격이 3원, 쌀 한 가마니가 45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담배는 고가의 사치품이었지만 '승리'는 늘 공급량이 부족했다. 일주일에 한 번 담배가 판매되는 날이면 담배 소매점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승리'에 이어서 1946년에는 독립과 민족의 자존심을 고취한다는 의미에서 백두산과 무궁화가 나왔다. 1949년 국군 창설 기념으로 만들어진 군용 담배로 유명한 화랑이 나왔고, 1950년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하자는 의미에서 건설이란 담배가 판매됐다. 

 1960년대 이후에 나온 담배 이름은 정부 시책을 홍보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것들로 새마을, 새나라, 희망, 상록수, 환희, 한산도, 거북선 등이다. 새마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써 담뱃갑을 디자인했으며, 협동이란 문구를 포장에 써 넣었다. 한산도와 거북선은 충무공 이순신의 애국충정을 본받자는 의미로 나온 담배였고, 수출주도 정책이 시작된 1970년대에는 관광객을 겨냥한 태양이 출시됐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와 더불어 배낭여행, 세계화, 해외유학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1990년대 이후부터는 글로리, 디스 등 영어 이름이 등장했다. 남북 화해 분위기를 반영하듯 남북한이 공동생산 및 판매하는 한마음이 나온 것은 2000년이었다. 

 담배를 둘러싼 유해 논장은 지금도 변함없이 진행중이다. 미국 공중위생국이 1964년 흡연은 암을 유발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이후, 담배 소비량은 점차 줄었고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금연이 대세이긴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골초 국가다. 담배의 사회문화사를 집필한 강준만 교수는 국민을 골초로 만든 주범은 다름 아닌 정부라면서 세계 각국의 금연 운동가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흡연자가 아니라 자국 정부라고 지적한다 세계 보건기구는 전 세계 정부에서 담뱃세로 거두는 돈이 연간 2 천역 달러에 달하나 흡연을 막는 데 쓰는 돈은 그중 0.2퍼센트도 안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 중용 23장